사실적인 유언

By | 2026-02-24

1989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직장인 부산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처음 뵌 공 병우 박사님을 처음 뵈었다. 공 박사님은 여든여섯이셨는데도 매일 같이 당신이 설립한 사설 문화단체인 [한글문화원] 사무실에 매일 출근하여 한글 글자판 배열을 연구하고 홍보하는 일을 혼자 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내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석 달을 고민하다 결국 교직을 그만두고 서울의 한글문화원으로 옮겨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공 박사님 연구 활동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공 박사님께서 병원 침대가 있는 빈 방을 나의 숙소로 내어 주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출근이고 밤 늦게 사무실 책상에서 침대가 있는 옆방으로 옮기면 퇴근 생활이었다. 출퇴근 시간이 없으니 연구할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거의 모든 시간을 공 박사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박사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다만 공 박사님도 연구에 바쁘셨고 나 역시 처음 접하는 분야의 연구라 배우는 시간이 더 많아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공 박사님께 여쭈어 보는 데 시간을 너무 적게 할애한 것이 많이 후회스럽다.

공 박사님께서는 유언장을 오래 전에 써두셨다고 하셨다. 나도 나중에 가족이 생기면 미리 유언장을 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에서 나중에 작성한 나의 유언장은 다분히 관념적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유언장을 쓰면서도 내 가족 중에 내보다 먼저 떠나는 이(1993~2018)가 있을 줄 조금도 생각해 보지 못으니까…

이제 환갑도 지나고 먼 타국 땅에서 나보다 먼저 떠난 아이의 사고까지 당하고 나니, 유언장이 예전처럼 관념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다. 구체적으로 내가 떠난 후 남겨진 가족과 가까운 이들에게 내가 남긴 흔적과 관계에 대한 마무리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며 남길 말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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