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오의 두려움으로 완주한 풀코스

By | 2009-08-16

4년 5개월만에 마라톤 풀코스 대회에 참가하여 완주했다.

2009년 혹서기 마라톤 대회

이틀 전 목요일 목달 뒤풀이에서 박 성호 님이 대회 신청을 했는데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고 대신 뛰라고 권하고, 때를 놓칠세라 서 사범님이 적극 바람을 잡아서 얼결에 뛰는 것으로 돼 버렸다. 다행이 원준이도 김 대희 님 대신으로 함께 뛸 수 있게 되어 그나마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이날(목달)의 낙오는 스스로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아직도 5.5km 지점 언덕을 넘다 심하게 토한 까닭이 짐작이 안 된다. 월요일에 헌혈을 한 것 외에는 다른 요인을 찾을 수가 없다. 아마 목달 첫날 걸었던 아픈 기억과 이날 걸었던 자괴감 때문에 준비도 없이 풀코스 대회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지 싶다.

10월 말 풀코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최근 한 달 사이에 30km 거리주를 두번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이번 대회는 언덕 코스가 많다지 않은가? 밀려드는 걱정으로 대회 전날 밤은 10시쯤부터 자려고 발버둥을 쳐는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 꼴딱 새고 말았다.

일단 30km를 목표로 세웠는데, 대회 장소인 대공원에 들어와서 언덕 길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아이~규… 바람넣어 여기 오게 한 서 사범님이 미워진다. 제발 하프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패이스 조절, 패이스 조절만 생각하며 출발선으로 갔다. 근데 원준이가 어디로 갔지? 옷 갈아 입다 헤어져 버렸다. 시계를 원준이한테 양보했기 때문에 패이스 조절을 하려면 원준이랑 같이 달려야 하고, 20km 정도는 패이스 메이커 역할을 내가 해 줘야 하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찾지? 아, 찾았다. 다행이다.

몸을 풀면서 원준이한테 km당 7분 패이스로만 달려도 4시간 55분이니 편안하게 달리자, 5시간 반에만 들어와도 되니 더 천천히 달려도 상관없다고 안심시켰다. 사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소리기도 했다. 준비 운동을 하고 출발 대기 장소로 이동할 때까지 서 사범님은 만나지 못했다.

혹서기 마라톤 출발

드디어 출발이다.

내리막길로 시작한다. 오버 패이스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편하게 아장아장 달렸는데 금방 1km 통과지점이 나온다. 6분 24초. 7분 패이스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6분 24초라니?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씨에 언덕길이 많다고 하지만, 이 정도라면 더 이상 느리게 뛸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패이스를 그대로 유지했다. 매 km마다 6분 22~3초가 유지되면서 별 부담없이 10km 지점을 통과했다. 하프 정도는 하겠군 생각이 들기 무섭게 코스가 산으로 바뀐다. 허걱!

도대체 이게 뭐야? 달릴 수가 없잖은가? 좀전의 10km 코스의 긴 언덕들도 그리 달갑지 않았는데, 이런 경사면 내려올 때도 관절에 부상이 문제되겠다. 일단 차분히 뛰었다, 한번 걸으면 계속 걷게 될 테니까. 다행이 음료수 대는 1km 간격도 안 되게 준비되어 있어서 다행이라 싶었다. 3km 정도를 가파른 산길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더니 반환점이 나온다. 이걸 왕복 여섯 번이나 해야 완주가 된다니… 돌아서 오르막 길을 오르는데 어이가 없다. 한여름 무더운 날씨에 이렇게 심한 오르막길이 많은 코스에서 풀코스 대회를 여는 까닭을 모르겠다. 철인 경기라도 하자는 건가? 오르막이 이 정도로 가파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알았다면 훈련을 해서 왔어야 했다. 이 길을 왕복 두번을 해야 하프 거리라도 채울 수 있는데, 허 참, 오늘 목표를 어떻게 수정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혹서기 마라톤 코스

결국 산길에서 첫번째 반환전을 돌고 나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두번째로 넘다가 걷고야 말았다. 걷는 거나 뛰는 거나 속도 차이가 없을 정도였고, 무엇보다 부상과 거리주에만 목표를 두자고 마음을 늦추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걷기는 했지만 이틀 전 목달에서 6~700미터를 걸었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풀코스 “대회”에서 또 걷다니, 합리화를 해 보지만 걷는 내내 자괴감은 나 자신을 괴롭힌다. 30km에 대한 생각만 하려고 노력하면서, 내리막길과 가벼운 언덕길은 더 열심히 달렸다.

산길 왕복을 한번 했다. 전광판에 1시간 50분이 표시되어 있고 몸상태는 아직 괜찮다. 두번째 왕복은 더 지친다. 가파른 오르막이 나오면 걷다 보니 몸은 안 힘든데 의욕은 떨어지고, 풀코스 “대회”에 나와서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이런 식으로 오르막 나오면 걷고 내리막 달리고 해서 30km 완주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군대 3년을 갔다 온 나에게는 “낙오”에 대한 압박감이 좀 유별난 편이다. 게다가 최근 여러 차례 30km 거리주에서 낙오한 데다, 목요일 10km에서도 걸었는데, 이틀만에 또다시 걷고 있다.

이번 왕복을 끝내면 22~3km, 하프는 넘기네. 한번 더 왕복하면 28~9km, 엇 30km가 채 안 되잖아? 애초 목표가 30km였는데, 1~2km 모자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한번 더 왕복하면 34~5km. 뭐야? 왕복 한 바퀴 남겨놓고 그만 둘 수는 없잖아. 누가 코스를 거리 계산이 딱딱 안 떨어지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 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대한 보상으로, 목표를 30km에서 완주로 바꾸었다.

산길 코스는 왕복 양끝을 돌고 나면 금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목표를 풀코스로 늘여잡고 나니 패이스 안배와 부상 방지에 대한 걱정이 더해지면서 패이스가 내려간다. 첫번째 왕복 후의 오르막 길에서 걷고 있는 나를 원준이가 뛰어서 나를 추월해 간다. 힘들어 보이는데, 정신력은 역시 대단한 녀석이다. 저러다 20km에서 주저 앉으면 어쩌려구. 그런데, 지금 뭥미? 남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나도 저렇게 꾸준히 뛰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날씨는 무덥고, 체력은 어디까지 버텨 줄지 가늠이 안 되고, 언덕에서 뛰어보니 너무 힘들다. 신발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간 것 같아서 벗어서 고쳐 신는데 순간 쥐가 난다. 놀라서 잽싸게 발을 뺐다. 별 수 없다. 언덕에서 뛰는 건 이 상태로는 무리다. 잘못하면 하프도 못 채우고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제는 언덕을 내려갈 때 받는 충격에도 신경을 써야 겠다.

혹서기마라톤2009

산길 왕복 두 바퀴째를 끝냈다. 2시간 40분이 표시되어 있으니, 왕복 6.34km에 50분쯤 걸렸다. 왕복 세번 남았으니, 2시간 30분쯤 남았다. 이대로라면 5시간 10분대에 완주할 수 있겠다. 하프는 넘었는데, 몸의 피로도는 아직 괜찮다. 다리에 쥐만 안 나게 주의하면 완주할 수 있겠다. 지금 패이스보다 더 늦게 뛰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부상만 안 입는다면!

산길 왕복 세번째를 끝내면서 전광판을 보니 3시간 30분이다. 한 바퀴 50분쯤 걸렸는데, 순간 나보다 한발 앞서 골인하며 박수를 받는 사람이 있다. 이런 날씨에 이런 코스에서 330을 하는 사람도 있다니, 우리 서 사범님은 들어왔을까? 330이 내심 목표였을텐데, 나에게는 아직 12km나 남았다. 종아리 바깥쪽 근육이 자꾸 쥐가 나려 하고, 왼발 바닥 아치도 불편하다. 이상하게 통증은 다리보다 목 뒤쪽 어깨 양쪽이 더 땡긴다. 풀코스 달리다 말고 자꾸만 고개를 뒤로 돌려 브아걸의 아브라카다브라 춤동작을 하고 있다.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네번째 산길 왕복을 시작하는데 마지막 왕복을 마치고 달려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일행을 찾는 소리가 가끔 들리는 걸 보면, 완주를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들도 좀 있나 보다. 그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있다. 걱정했던 원준이도 지금까지 걷지 않고 달리고 있다. 힘들어서 음료수대마다 들러 물이나 게토레이를 마시고, 수박이나 바나나를 마신다. 방울 토마토는 껍질이 목에 걸릴까 봐 먹지 않았다. 신발에 물이 들어갈까 봐 몸에 물 바가지도 안 뒤집어 썼다. 종아리 바깥쪽 근육이 아슬아슬하다. 조심조심해서 달려서 드디어 마지막 한 바퀴가 남았다.

멀리 앞서갔기에 반환점 돌 때나 보이던 원준이가 저기 앞 주로에 보인다. 실신한 표정으로도 걷지 않고 35~6km나 달리고 있다.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다. 이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원준이 가파른 오르막 중간쯤에서 걷는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6km도 채 안 남기고 걷기 시작하는 걸 보면. 마지막 바퀴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추월하게 될까 살짝 미안해진다. 무슨 소리? 아직 저만치 앞에 가고 있는데, 넌 오늘 첫번째 반환점부터 걸었잖아? 유종의 미라도 보여줘 봐! 그래서 물 바가지를 두어 차례 끼얹고 정신을 차려서 온힘을 다해서 달린다. 오르막도 달릴 수 있는지 시험해 봤지만, 곧바로 종아리 근육에 경련이 오려고 한다. 빠르게 걸어 오르고, 내리막길을 최대한 가볍게 스퍼트를 한다. 마지막 반환점 못 미쳐서 원준을 추월한다. 미안하다 소리는 너무 주제넘은 것 같아서 “쥐 나지 않게 주의해서 달려라” 하고 인사하고 앞서 나간다.

돌아오는 길에도 물 바가지를 서너 차례 끼얹고, 걸었던 기분을 조금이나마 털어내고 싶어서 달린다. 마지막 왕복에 50분이 걸리면 5시간 10분대, 5분쯤 당기면 5시간 5분대가 되겠지 생각하며 힘을 낸다. 완주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주로에 달리는 사람 수가 적다. 그래도 마지막 바퀴에서 여러 사람을 추월한다. 다 늦게 뭔 모습이람? 게의치 말고 나 자신에 집중하자고 다짐하며 쥐가 나지 않을 만큼 원없이 달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나와 패이스 경쟁을 하는 사람들이 두어 명 있다. 끝내 다 추월하고 골인! 기록은 5시간 06분 41초.

출발 시각 내측코스(10.5km) 외곽코스1 (6.34km) 외곽코스2 (6.34km) 외곽코스3 (6.34km) 외곽코스4 (6.34km) 외곽코스5 (6.34km)
8:02’10” 9:05’50” 9:49’47” 10:41’31” 11:31’46” 12:22’04” 13:08’51”
구간 기록(Pace/1km) 1:03’40″(6’04”) 43’57″(6’56”) 51’44″(8’02”) 50’15″(7’53”) 50’18″(7’53”) 46’47″(7’15”)
순위 626
기록 5:06’41”
(7’15″/km)

다른 분들은 사정이 있어서 먼저 가고, 1시간 넘게 기다려 준 서 사범님과 원준이랑 셋이서 생맥주 집에 가서 각 2천씩 마시며 완주해 낸 뿌듯함을 나누고 돌아왔다.

혹서기마라톤 09

배번이랑 시계랑 빌려준 박 성호 님께 감사드립니다. 너무 늦게 들어오는 지루한 시간 동안을 기다려준 서 사범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대회명 혹서기 마라톤
대회 날짜 2009년 8월 15일
접수자 1,464 명
참가자 1,299 명
완주자 933 명
완주율 71.82 %

아차, 생맥주 마시면서 또 꼬여넘어갔구나. 2주 후에 있는 풀코스에 같이 또 나가기로! 헉~

2 thoughts on “낙오의 두려움으로 완주한 풀코스

  1. hopark

    고마워요! 2주에 한번씩 뛰어보기로 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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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명호

    완주 축하드립니다. 도전하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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