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학문, 섹스의 공통점 / 박노자

By | 2010-08-16

원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4917.html

제가 체 게바라 관련의 일화 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스토리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가 혁명이 승리한 뒤에 관료직을 하면서도 밤에 아바나의 부둣가에서 짐꾼으로 ‘아르바이트’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권을 잡은 뒤에는 얼마든지 자신의 월급을 높이 책정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정부 일이 아닌 육체 노동으로 ‘용돈’을 벌었다는 ‘혁명 지도자’…. 누가 그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혁명은 사랑과 같다, 사랑을 돈 받기 위해 하는 것이냐?”라고 반문하곤 했답니다. 혁명을 좋아해서 한 것이지 고관이 되어서 고대광실에서 푸짐한 녹봉을 받으면서 안락하게 살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그 교훈은 의미심장합니다. 정치활동이 돈과 맞바꿀 수 있는 하나의 제도권 ‘직업’이 되는 순간, 그 활동을 통해 근본적 변혁을 이룰 수 없는 것이고, 근본적 변혁을 이루겠다는 큰 정치인은 끝내 자기 활동의 제도적 ‘정기화’를 예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관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공산당에 입당하는 이들이 생기는 순간, 그 공산당을 그냥 해체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런 공산당은, 어느 정도 안정화된 중심부 국가에서는 사민주의 이상의 활동을 하지 못할 것이고 주변부에서는 스탈린 주의로 전락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변혁적인 정치도 그렇지만, 섹스라는, 몸둥이를 가진 이 중생의 최고의 쾌락도 ‘제도화’되면 점차 퇴색합니다. 더군다나 제도화에 의한 강제까지 생긴다면 ‘맛이 있는 섹스’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떤 제대로 된 섹스도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바로 그러기에 ‘부부 사이의 강간’이라는 개념은, 요즘 법적으로까지도 성립됩니다. 비록 서로에게 섹스를 제공할 ‘도덕적 의무’가 있는 부부라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섹스를 강제로 시킨다면 일반 강간과 다를 게 없는 흉악범죄일 뿐이죠. 물리력까지 동원해서 시킨다는 것은 법정이 다루어야 할 범죄지만, 사실 남편/부인의 ‘도덕적 권한’을 이용해서 상대방에게 섹스를 요구한다는 것부터 부질없는 짓이라고 봐야 합니다. 둘이 자율적으로 의기투합하여 하는 것이지 한 쪽이 다른 쪽에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논리의 연장 선상에서는, 저는 (적어도 고도로 발전된 복지국가가 아닌 경우에는) 성산업의 존재의 불가피성을 인식하지만, ‘돈을 주고 사는 섹스’에 개인적으 로는 매우 부정적입니다. 돈을 무기로 하는 ‘경제력에 의한 강간’, 즉 양쪽의 자율성이 충분히 보장돼 있지 않은 부자유한 성행위이기에 그렇습니다. 차라리 그러한 측면에서는 양쪽이 자율적으로, 좋아서 하는 혼외정사는 훨씬 더 바람직하고 도덕적입니다. 물론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동등하게 혼외정사를 즐길 권리가 보장돼 있고, 혼외정사를 즐기면서도 가족 테두리 안에서 아동 양육 등의 문제를 아동에게 피해를 가하지 않고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즐기면 된다는 이야기죠.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면 그게 벌써 ‘도덕’과 사이가 먼 일일 것입니다.

혁명의 순수성도 섹스의 즐거움도 돈이나 강요, 강제의 냄새만 나면 당장에 도망갑니다. 돈을 미끼로 하거나 힘으로 시키면 진정한 혁명도 맛이있는 섹스도 얻어낼 수 없는 것이죠. 그러면 학문은 과연 이와 다른가요? 창조성이 있는 진정한 학문 연구는 이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제가 지금 예컨대 1930년대에 하얼빈에 자꾸 왕래했던 이효석이나 홍종인, 전무길 등 경성이나 평양의 소설가, 신문 기자들이 하얼빈의 백계 러시아인들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 이국적 건물 양식이나 퇴락적 카바레들의 슬프면서도 계속 웃어야 하는 러시아 무희들의 얼굴 표정에서 뭘 읽어냈는지 궁금해서 관련 연구들을 하는 것이지 누가 저보고 “9월말일까지 연구 완료하여 논문 제출하라”고 애당초부터 명령을 내려 제 연구 진행의 시간적 범위 등을 타율적으로 규정했다면 아마도 처음부터 그 연구가 싫어졌을 것입니다. 연구도 사랑의 일종입니다. 낡은 신문, 잡지들의 냄새부터 과거 사람들의 위대한 발견과 위대한 편견까지 애착을 갖고 대하지 않는다면, 연구할 수는 없는 것이죠. 물론 김성수와 <동아일보>를 연구하는 학자는 고창 김씨의 재벌을 사랑할 의무는 없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 대한 ‘흥미’ 가 없으면 안되며, 고창 김씨들의 착취에 맞서 파업을 벌였던 경방의 여공들을 얼마든지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죠. 하여간, 연구라는 것은 마음이 ‘댕겨져야’ 하는 것이고, 누군가가 타율적으로 규정하거나 강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에서는 결과 그 자체보다 자료 하나 하나 만지며 그 결과를 도출해내는 ‘과정’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혁명이나 섹스와 상당히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지금 과연 국내의 소장파 인문학자 대부분이 ‘맛이 있는 섹스’와 비교될 수 있는 ‘맛이 있는 연구’를 천천히,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노무현 정권이 발족시키고 이번 정권이 계속 추진하는 ‘인문 한국 (HK)’과 같은 거대 프로젝트의 테두리 안에서는 소장파 학자들이 연구자로서의 ‘시한부 인생’을 살고 타율적으로 규정된 형태의 결과물들을 부단히 생산해내야 되는 것입니다. 결과물로서는 주로 ‘등재지 논문’만이 통하는 것이고, 이 등재지 논문의 일정한 편수를 연례 내지 않는다면 다시 고등실 업자나 ‘보따리 장수 (시간 강사)’로 전락돼야 되는 것입니다. 본인이 자료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아주 좋은 글을 천천히 쓰고 싶든, 자료를 크게 수집해서 아예 논문이 아닌 단행본 하나쯤을 2~3년 후에 내고 싶든, 일단 장기적 연구 계획 일환으로 먼저 2~3년 들여서 자료 정리부터 하고자 하든, 관리자들에게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일정한 양의 논문을, 일정한 기간 내에 써서 일정한 학술지에 발표하지 않으면, 무조건 나가라, 이것입니다. 연구 대상에 대한 흥미라든지, 연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방법론적, 이론적 고민이라든지, 장기적 연구라든지 – 이것은 관리자들에게 하등의 관심사도 안됩니다.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당신의 학문적 관심을 무조건 우리의 규정에 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 시스템에서 탈락하라, 이것입니다. 자존심이 있는 연구자라면, 그러한 시스템의 테두리 안으로 아예 발을 들이지도 않을 것일 걸요. 문제는, 국내의 대단히 열악한 조건 하에서는 소장파 연구자들에게 자존심을 살리겠다는 생각을 할 만한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개인적 의향, 취향, 흥미 등등)과 무관하게 그저 ‘시키는 대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과연 위대한 학문이 탄생하나요?

저는, 이 ‘인문 한국학’ 시스템을 어느 정도 관찰한 뒤에 적어도 외국에서 학위를 받으신 국내 동료 제위께 다음과 같이 읍소하고 싶습니다. 최소한의 기회라도 있으시면 제발 귀국하여 이 지옥적 시스템의 포로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북미나 일본, 유럽에서 어쩌면 훨씬 더 많은 자율성을 누리면서, 훨씬 더 진정한 학술적 분위기에서 관련 분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성이란, 한 번 말살 당하면 다시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애국자라 하더라도 창조성을 씨말리는 이 학문의 도살장으로 제 발로 걸어갈 의무까지 없습니다. 가급적 귀국 거부를 해서, 한국 당로자들로 하여금 왜 이와 같은 두뇌 유출이 발생되는지를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게끔 해봅시다. 그게 진정한 애국일 걸요. 우리 저항이 없으면 저들은 끝내 정신 차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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