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27-45…

By | 2007-03-28

아버님 떠나신 지 스물일곱해가 된 날을 맞으며,
할아버지의 삶의 향기로써,
살가운 손주들과 못난 아들과 며느리의
건강과 넉넉한 마음을
청해 올립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날인데, 어느덧 27년이 지났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타지의 하숙방에서 공부에 한참 빠져들어 있을 때였으니, 열여덜.
그때 아버님 연세 마흔 다섯.
그날이 스물일곱번을 돌아 그때의 아버님 나이에 와버린 나.

스물일곱번이나 울음을 참지 못하고 맞았지만 여전히 아버님 생각을 떠올리면 눈물을 가릴 수 없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나로 인해 눈물 흘리지 않게 하리라 다짐했는데, 세상 일이 그리 마음 먹은 것처럼 쉽던가… 아직은 그런대로 잘 넘기고 있다만, 인생의 절정에서 뜻하지 않게 끝이 보이지 않는 추락을 거듭하면서 아버님, 어머님, 내 가족들을 떠올리며 지혜를 쫓으며 지금까지 왔다.

자랑스런 아들이고 아빠이고 싶었는데, 한 동안 그리 산다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의 내 모습을 아버님, 어머님이 그리 생각해 주실지, 우리 아이들이 존경스런 모습으로 마음에 담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는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나 싶다가도 느닷없이 사라지는 부질없는 현실 앞에, 운동의 재기처럼 인생의 재기 또한 몹시 지난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성공의 의미를 우리 나라 사람 대부분처럼, 일의 성취로 보던 때 나는 참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렸다. 비굴해지지 않으려 했고, 나태해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베풀면서 그 성취에 오르는 데는 많이 미흡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나에게 성공의 의미는 일의 성취보다는 삶의 성취가 가장 소중하게 자리잡았다. 가족과 자신의 삶은 뒷전으로 하고 일부터 성공해 놓고 보려는 조바심은 많은 것을 희생하게 만든다. 일하지 않는 게으름보다야 백배 낫겠지만, 일만 이루고 가족과 자신의 삶은 다 무너진 성공이란 한낱 욕심에 사로잡힌 집착이고, 분에 넘치는 사치와 다를 바 무엇인가?

자축 코드의 마지막 날에 태어나신 아버님과 축술 코드로 태어나신 어머님은 내 어릴 적 기억으로 정말 죽도록 일만 하시는 모습 그 자체였다. 그 덕에 우리 삼형제는 차츰 넉넉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고생하며 잠깐 함께 마주하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은 적지 않다. 아마 살아 계시면서 나눈 대화의 시간보다 돌아가신 후 나눈 대화의 시간이 훨씬 많아보인다. 이렇게 마음 속에서 아버님을 보내 드리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내 가족과의 그만큼 애틋한 시간 또한 만들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이런 아빠를 우리 아이들은 나중에 커면 어떻게 기억해 줄까?

다행이 최근에는 건강하게 달리고 나누는 것의 소중함을 알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 아이들에게 그 소중함을 충분히 깨닫게 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다행이 애들 엄마는 건강에 대한 소중함을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 다행이다. 두 아이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깨닫게 되지 싶은데, 내가 그런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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